[주간영감] 2022/1-1 필사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글을 옮겨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부터 새로운 경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아래 세 분들이 쓴 글을 필사해보려고 한다.
김지수 작가의 겸손함과 배려가 묻어있는 글
이재철 목사의 은혜롭고 절제된 기도문
김훈 작가의 입체감 있고 필력있는 글
쓴 사람의 생각이 오롯이 담기는 글.
따라 써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경험의 문을 또 하나 열어본다.
1
김지수
자존가들
작가의 말
인생은 달콤한가요 쓸쓸한가요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내고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평균 나이 72세, 우리가 좋아하는 어른들의 말’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인터뷰집이 독자들의 가슴을 봄비처럼 적셨던가 봅니다. 딸이 엄마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리더가 팀원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어른들의 지혜가 파도 타듯 손에서 손으로 퍼져 가는 광경은 황홀했습니다. 머리맡에 두고 힘들 때 인생의 교본처럼 펼쳐 봤다는 분, 교환 일기처럼 친구와 책에 그은 밑줄을 비교하며 봤다는 분, 다른 사람을 위해 일부러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카페에 슬쩍 놓고 왔다는 분도 있더군요. 호들갑 떠는 걸 보니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라도 올랐나?
아니요. 천만의 말씀. 아직 제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만, 뭐랄까요. 저는 독자들이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대하는 이런 식의 태도가 참 좋았습니다. 무언가를 귀히 여겨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건 얼마나 어여쁜 마음입니까. 좋은 인생에 대한 예우, 밑줄 그어 듣는 그 경청의 반듯함, 서로 덕담을 나누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질 때의 넉넉함,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어른들이 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같은 것들. 제각기 떠났던 식구들이 저녁밥 짓는 냄세에 이끌려 돌아오듯, 그렇게 어른의 아름다운 선창에 하나둘씩 터 잡고 모여 앉는 풍경이 좋았습니다.
책 발간 후에 인터뷰이로 등장했던 몇몇 어른들을 찾아뵈었지요. “능력도 체력도 10퍼센트는 남겨 두라”던 93세 현역 디자이너 노라노부터 “날씨처럼 다 받아들이라”던 화가 노은님, “일이 안 풀릴 땐 일단 시동을 끄라”던 이성복 시안 등등. 감사하게도 선생들ㅇ 자신이, 제가 온라인에 연재하는 인터뷰 칼럼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의 열혈 독자가 되어 소감과 아이디어를 보태 주셨습니다. 특히 이성복 시인은 이 인터뷰 책이 시리즈로 쌓이면 좋겠다며, 슬쩍 나태해지려는 제 마음의 고삐를 잡아 주셨지요. 그렇게 1년이 조금지나,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에 이은 두 번째 인터뷰집 <자존가들>을 여러분 앞에 내놓습니다.
돌아보니 <자기인생의 철학자들>까지는 애타는 ‘어른 찾기’였어요. “손해보며 살아도 괜찮은가요?” “나는 누구의 비위를 맞춰 살아야 합니까?” “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되는 거죠?” “우리는 어떻게 늙어 갈까요?” 사방으로 솟구치는 인생 질문에 애틋한 응답이었지요. 지혜자 노인들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온화한 미소, 평화롭게 찰랑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여러분을 환영했습니다. “네가 와 줘서 기쁘다!”
그 뒤 1년간 저의 선택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이 땅의 ‘자존가들’을 찾아 나서고 있더군요. 나이의 많고 적음, 사회적 성취라는 세상의 기준보다 진정한 나로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찾아 호명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나다움’의 위엄 서린 목소리에 확성기를 대고 기록한 책이 <자존가들> 입니다.
가치의 아노미 시대에 맞서, 자기만의 결연하고 우아한 목소리를 지켜 낸, 자존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혜자’라는 이름만으로 동시대 크리에이터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었던 ‘자존의 여인’ 김혜자를 시작으로 행복은 신기루와 같으니, 작은 즐거움으로 큰 슬픔을 덮고 살라고 정신 번쩍 들도록 호통을 쳐 준 유쾌한 정신의학자 이근후 선생. “내 인생은 기프트였다”고 고백한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까지. 특별히 이어령 선생은 암 투병 중에도, 마지막 인터뷰로 찬란한 죽음의 풍경화를 선물해 주셨지요.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 “우리는 어떻게 늙어갈까요?”에 대한 소상한 응답이었던 <자존가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나를 지키며 삶과 죽음을 마주해야 할까요?”에 대한 생생한 화답입니다. 매주 월요일, 부검실에서 죽은 자의 가슴을 열어 보는 법의학자 유성호는 우리의 육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죽는지, 마지막 순간을 탕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담담한 어조로 전합니다. 부디 죽음 앞에서 벌벌 떨지 말라고, 나의 죽음을 의사의 나레이션으로 만들지 말라고요. 그리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는 날까지 웃음이 나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뿐”이라는 이근후 선생의 진정한 토로와 “죽음을 기다리며 탄생의 신비를 배웠다”는 이어령 선생의 호기심에 찬 눈빛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생을 더없이 농밀하게 만듭니다.
시간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눈이 부시게>에서 시간의 엉킨 실타래를 헤쳐 온 김혜자 선생님을 만나 보니 “지금 이 시간을 잘 붙들라”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더군요. 미래를 앞당겨 공포로 회칠하던 저의 버릇은 겸손한 인문학자 최대환 신부가 고쳐 주었습니다. 미래는 착취의 대상이 아니니, 오직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지요. 평범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최신부의 말대로 봄을 믿어야 합니다. 특별히 18년간 노숙자로 추운 거리를 떠돌던 임상철은 그 봄의 증거이자 자존가들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태어났으니 행복하다”는 그의 고백 앞에서 은연중 잘나고 못난 인생을 저울질하던 저는 교만의 꼬리를 내려야 했습니다.
젊었거나 늙었거나 자존을 자본으로 지닌 사람들은 각자의 색채로 빛났습니다. “노후 준비는 돈이 아니라 일”이라며 늘 새로운 도전을 마다 않는 개그맨 전유성. “성공은 높이보다 넓이”라는 유튜브 슈퍼스타 리아킴, “힘든 일은 항성 먼저 했다”는 홈런왕 이승엽과 “허송세월이 쌓여 어느 날 문득 좋은 이야기가 나오더라”는 가수 이적의 이야기는 재능에 대한 우리의 불안을 잠재웁니다.
알고 보면 자존가들의 가장 큰 자본은 끈기 있게 쌓아 가는 하루하루의 성실이었습니다. “배우로 사는 건 개똥 같다”면서도 여전히 연극 무대에서 펄떡이는 신구 선생, 언제나 청춘인 디자이너 지춘희와 화가 황규백,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우리를 얘술이라는 로맨틱한 무대로 안내합니다. 왼쪽 눈엔 아름다움, 오른쪽 눈엔 희망을 가득 담고서요.
자존가들과 만날 때마다 저는 습관적으로 거대한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인생은 달콤한가요. 씁쓸한가요. 아름다운가요. 슬픈가요. 당신은 약한가요. 강한가요. 다정한가요. 무정한가요.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자연히 알게 됐지요.너와 나의 삶엔 그 모든 속성이 다 있다는 걸.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걸. 고백하자면 저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그림책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였습니다. “내 상상력의 원동력은 걱정”이라는 소심쟁이 작가에게서 저는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살던 걱정 많은 어린이가 자존의 원형이었다는 점에서요.
각자의 인생은 선택의 누적분이라고 하지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되짚어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인터뷰 또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누구를 만날 것인가가 인터뷰의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오늘의 인터뷰이는 내일의 인터뷰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하여 선택의 누적분으로 모인 인터뷰 모임은, 집단지성의 모양을 띤 하나의 인생이자 발굴된 인격으로 다가옵니다. 신기한 일은, 사람에게도 타고난 기운이 있듯 한 사람의 이야기도 세상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한 기세가 있고 또한 성장하나는 거지요.
말하는 자의 진의는 듣는 자의 호의로 완성된다는 현자의 말을 믿습니다. 차마 내가 듣지 못했던 진리는 여러분이 발견해 내리라 믿습니다. 이 책이 부디 당신의 자존에 거름이 되길 희망하며,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2020년, 1월
김지수